무엇이 태도를 결정합니까?
일시 : 2026년 10월 15일
본문 : 사도행전 5:33-42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사실 우리는 기분이 나쁘다고 언제나 기분대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집에서는 기분이 안 좋으면 말수가 줄고 퉁명스럽게 말할 때도 있는데, 밖에 나가 중요한 사람을 만나면 또 웃으며 인사합니다. 직장에서도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상사가 부르면 일단 “네” 하고 갑니다. 그러고 보면 기분과 태도가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서로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분뿐만 아니라 상황도 우리의 태도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상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마음도 함께 흔들립니다. 기대했던 일이 잘되지 않고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계속되면 평소와 같은 믿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도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붙잡혀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앞 29절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오른손으로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33절에서 공회원들이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제 단순한 경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입니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실제로 채찍질까지 당했는데도 41절을 보면 사도들은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납니다. 그리고 42절에서는 다시 예수님을 전합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사도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사도들의 태도를 결정하고 있었을까요? 상황이 그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면 무엇이 그들의 태도를 결정하고 있었을까요?
1.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첫 번째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33절 이후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율법 교사였습니다.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가말리엘이 일어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드다와 갈릴리 유다입니다. 이들도 한때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고 무언가 큰일을 일으킬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지도자가 죽자 따르던 사람들도 흩어졌고 결국 그 움직임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이 38절과 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가말리엘이 여기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지켜보자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도들이 하고 있는 이 일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인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사도들이 무엇이라고 증언했습니까? 30절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그를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드다와 유다는 그들이 죽자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높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42절이 중요합니다.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결국 사도들이 붙들고 있었던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들의 태도를 결정한 것은 상황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붙잡힐 수도 있고 더 심한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믿는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꾸 상황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고 합니다.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확신, 이 문제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릴 것이라는 확신을 믿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더 근본적인 확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내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는 아는 것입니다.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아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높이신 우리의 임금과 구주이십니다. 그래서 상황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지 않으려면 상황보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태도를 결정했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그 이름을 향한 사랑
두 번째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한 것은 ‘그 이름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확신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이름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40절과 4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짧은 두 절 속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입니다. 공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바로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공회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할 이름이었지만, 사도들에게 그 이름은 수치를 감수하면서까지 붙들 만큼 귀한 이름이었습니다.
특별히 41절에는 우리말 성경으로는 잘 알 수 없고,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인상적인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여기에서 ‘합당한 자로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 카탁시오오(καταξιόω)에서 온 표현입니다. 어떤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능욕 받다’는 헬라어 아티마조(ἀτιμάζω)에서 온 표현으로, ‘수치를 당하다, 명예를 빼앗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여기에서 아주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 보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수치를 당할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수치를 주려고 했습니다. 채찍질하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사건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런 수치를 받을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구나.” 그래서 기뻐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고통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채찍에 맞아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그만큼 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어릴 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형이 있었는데, 어린 제 눈에는 그게 조금 가식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티를 내는 제가 더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 행동을 칭찬하시는 겁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그 감정이 내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입니다. 내 기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기분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당한 수치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더 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우받았느냐보다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이 길을 걷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확신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이름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기에 사도들은 상황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았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42절을 보면 그 이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다시 성전으로 갔습니다. 다시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다시 붙잡힐 가능성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다시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그리스도이셨고, 그 이름이 여전히 귀했기 때문입니다. 40절에서 공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42절에서 성경은 사도들이 그치지 아니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때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향한 확신과 사랑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새벽 우리가 여기까지 나온 것도 그런 걸음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도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마음에 무거운 것이 있고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앉았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가지고 한 가지 질문만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어디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상황 때문에 멈춰 있던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지쳐서 내려놓고 있던 믿음의 자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떠오르는 자리가 있다면 그곳으로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다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다시 걷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오늘도 우리에게 귀하기 때문에 다시 걷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온 것처럼 이제 예배를 마치고 우리의 삶으로 다시 걸어갑시다. 사도들이 다시 성전으로 갔고, 다시 집으로 갔고, 다시 예수님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 이름을 붙들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확신과 그 이름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하루가 되기를,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주님 때문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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