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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3일
2026-10-09 21:52:24
꿈미
조회수   68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일시 : 2026년 10월 13일
본문 : 사도행전 5:1~11

 

 

성도 여러분, '쇼 윈도(Show Window)‘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상품을 파는 상인이 지나가는 구매자나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가게의 바깥 유리창 바로 앞에 상품을 진열합니다. 이처럼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가게의 유리창을 ’쇼 윈도‘라고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대 사회로 오면서 이 개념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 행색,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관계를 “쇼 윈도 관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쇼 윈도(Show Window)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나의 삶을 전시하고 증명해야 하는 피로감 속에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세련된 모습,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만이 정성스럽게 편집되어 올라갑니다. 또한 사람들은 타인이 눌러주는 '좋아요'의 개수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하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보여주기' 문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영역, 거룩해야 할 교회의 문턱까지 너무도 쉽게 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깊고 은밀한 교제보다 사람들에게 내 신앙이 어떻게 비칠지를 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하면 사람들이 나를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겠지?‘, ’직분자로서 이 정도 헌신은 보여줘야 체면이 서지 않을까?‘, ’내 안에 감춰진 영적 메마름과 우울함을 들키면 사람들이 나를 정죄할 거야.‘ 이처럼 타인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 사람들을 관객으로 삼은 '종교적인 보여주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기록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내용이 2천 년 전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님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겉모습의 화려함에 집착하며 내면의 진실함을 잃어버린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하고도 사랑 어린 경고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나와 우리 가정은 지금 사람을 향해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가?" 이 가볍지 않은 질문 앞에 우리의 신앙과 모습을 비추어 보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의 회복

 

오늘 본문에 앞선 사도행전 4장 후반부에 묘사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그야말로 지상에 내려온 천국과도 같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자기만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자발적으로 땅과 집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고, 교회는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히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전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의 순전한 헌신은 교회의 큰 기쁨이 되었고, 성도들 사이에서 바나바는 깊은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아름다운 영적 부흥의 한복판에서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소유를 팔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그 판 값의 일부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이들 역시 바나바 못지않은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처럼 보입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부동산을 처분해 헌금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엄청난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헌신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거짓을 폭로합니다.

이 부부는 드리기로 결단한 값의 일부를 몰래 감추어 두고서,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위장합니다. ’보여주기식‘의 결단만 있을 뿐, 부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나 이웃을 향한 긍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영적인 명예를 얻고 싶다‘, ’공동체 안에서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명예욕에 기인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베드로는 그들의 헌신의 크기에 속지 않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그들의 병든 내면을 정확히 찌릅니다. 3절과 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예배의 앞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열정으로 봉사하며 '믿음 좋은 성도'의 타이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과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감찰하신다.” 오늘 본문은 불꽃 같은 눈으로 심령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앞에서‘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코람 데오의 삶이란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골방에서도, 아무도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궂은일의 자리에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입니다. 사람의 박수갈채가 멈춘 곳에서 비로소 우리의 진짜 신앙이 증명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2. 행위가 아닌 중심의 정직함

 

오늘 본문은 믿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전부를 헌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헌신의 본질을 외형적인 '양(Quantity)'으로만 평가하려는 인간적인 계산법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본문 4절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의 책망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나니아 부부에게 완벽한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은 원래 그들의 것이었고, 팔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팔고 나서 절반만 헌금하고 절반은 생활비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 일부만 드립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면, 하나님은 그 작은 헌신조차 기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산 진짜 원인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신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지 속에 숨겨진 '거짓'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싫었던 그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헌신하지 못하면서도 온전히 헌신한 척 연기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흔들리며, 때로는 헌신하기 아까워하는 나의 부끄러운 밑바닥까지도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아오는 '상하고 통회하는 정직한 심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봉사와 헌신, 사역의 규모가 아무리 크고 대단할지라도, 그 안에 '나의 영광'을 구하는 교만과 거짓이 섞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너무나 보잘것없는 수고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화려한 겉모습의 보여주기 신앙이 아닌 내면의 정직함과 순전함을 가꾸는 신앙의 자리를 위해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3. 영적 파수꾼이 되는 가정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이들이 부부였으며 한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9절 상반절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남편이 교묘한 명예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예물의 절반을 감추자 했을 때, 배우자는 그 영적 타협에 제동을 걸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인 삽비라는 오히려 그 죄에 동참하여 ‘함께’ 거짓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남편인 아나니아가 죽고 난 뒤,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도 회개할 기회를 또 한 번 놓쳐버렸다는 사실입니다. 8절 가운데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라고 마지막 자비의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는 끝까지 거짓말을 고수하며 파멸의 길을 걷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부부는 서로의 영혼을 맑게 비춰주는 영적 거울임을 믿습니까? 부부 그리고 가정은 서로를 지켜 보호하는 거룩한 파수꾼으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죄의 유혹 앞에 흔들릴 때, 세상의 성공 방식과 타협하려 할 때, 부부는 그리고 가족은 서로를 향해 사랑의 책망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화목하고 부유해 보이는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영적으로 견인하며 지키고, 기도하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된 보여주기식 신앙의 결말은 즉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가혹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본문의 마지막인 11절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절이 기록하고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그냥 무섭고 두려워 벌벌 떠는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구별되고 완전한 거룩의 기준이 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 기초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싹을 틔운 초대 교회가 세상의 방식인 거짓과 위선의 누룩으로 타협하는 모습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작은 부분일지라도 이러한 신앙이 교회 전체를 좀 먹고 썩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름이 나고 염증과 세균에 오렴된 환부를 그저 둘 수 없듯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한 거룩한 수술을 단행하셨음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안타까운 사건 이후로 초대 교회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얄팍한 위선의 복음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픔 뒤에 진짜 신앙과 십자가의 복음으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하고 거룩한 공동체로 몸 된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나와 우리 가정이 다시 한번 신앙과 교회를 향한 헌신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척하는 포장'이나 ‘보여주기식’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정직함'임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할 때, 내 삶의 자리가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의 봉사 자리이든, 사람들의 평가 앞이 아니라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 서기를 축언합니다. 오직 나의 중심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저울 앞에 서기를 결단하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람의 인정이 아닌 은밀한 곳까지 감찰하시고 참된 수고와 헌신, 그리고 부족함을 고백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기시기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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