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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7일
2025-10-01 10:23:02
꿈미
조회수   65

밥상에 임한 평화

 

일시 : 2025107

본문 : 누가복음 2:1-14

 

  성탄절이 되면 전 세계가 들썩입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캐럴이 울려 퍼지며,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문화와 인종, 심지어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특별한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상점들은 성탄 특수를 노리고, 가족들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야말로 전 지구적 '성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종종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도대체 왜 기뻐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즐기지만, 정작 그 기쁨의 근본적인 이유는 모릅니다. 선물 교환의 즐거움, 가족과의 따뜻한 시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이 나쁘지는 않지만, 성탄의 본질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마치 성대한 잔치는 벌이고 있지만, 정작 그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초의 성탄절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인해 베들레헴은 그야말로 성수기를 맞았습니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여관마다 만원이었고, 거리는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성수기 속에서 정작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님을 맞이할 자리는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누가복음 21-14절은 이런 역설적 상황을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를 보여줍니다. 성수기에 가려져 외면당하신 아기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말구유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 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성수기에 가려진 메시아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1).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명령으로 온 제국이 들썩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에 이름을 올려야 했습니다. 이 호적 명령이 베들레헴에 미친 영향을 상상해 보십시오. 평범한 한마을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여관들은 만실이 되었고, 상인들은 특수를 누렸습니다. 베들레헴 전체가 활기 넘치는 성수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성수기 한복판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4-5).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7).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이 땅에는 그분을 맞이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숙박 부족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번영과 북적임이 오히려 예수님을 거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태어나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은 메시아에 주목하기보다 성수기에, 많은 사람에, 장사에 주목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덜 필요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당장에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무언가에 열광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간절히 구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처럼, 성수기의 번영이 영적 무감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의 '성수기'를 기대합니다. 승진, 성공, 건강, 좋은 인간관계로 삶이 북적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성수기의 바쁨이 우리로 하여금 정작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거절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삶의 성수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밀어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거절로 좌절되지 않습니다. 화려한 궁전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세상이 거절할 때, 하나님은 더욱 겸손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2. 밥상 위에 오신 예수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예수님이 누이신 '구유'는 짐승들의 먹이통, '밥그릇'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긴 상징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엘리야에게 공급하신 떡과 고기.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의 모습은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를 명확히 선언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51)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 사람들은 계속해서 공짜 떡을 제공해 주는 왕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거부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9-50).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그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떡을 먹은 사람들도 다시 배가 고팠고,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다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시적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영원한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해 줄 떡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해 줄 생명의 떡을 주셨습니다.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의 모습은 바로 이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떡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떡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더 많은 떡을 주시는 분'으로만 기대합니다. 더 나은 직장, 더 많은 수입, 더 좋은 건강, 더 원만한 인간관계. 이런 것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이런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필요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떡을 주시는 분'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우신 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떡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게 됩니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더 깊은 교제를, 더 큰 성공이 아니라 더 온전한 순종을 추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을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성수기에 외면당한 아기 예수님, 그러나 말구유라는 밥상에 누우심으로 생명의 떡 되심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성탄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혹시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성수기의 분위기와 즐거움 때문은 아닙니까? 선물 교환의 기쁨, 가족과의 따뜻한 시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이 나쁘지는 않지만, 만약 이것이 우리 기쁨의 전부라면 우리는 성탄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성탄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일시적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양식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다시는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성수기를 맞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바쁜 일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성수기의 번영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심령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여관에 자리가 없다고, 너무 바쁘다고, 다른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화려한 궁전 같지 않고 초라할지라도, 그곳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떡으로 배를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떡이 되셨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달래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밥상에 임한 평화, 말구유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붙잡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안에서 성탄을 맞이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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