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의 진짜 기준
일시 : 2025년 12월 6일
본문 : 누가복음 16:14-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단순히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배우고, 닮아가는 삶 전체가 바로 ‘제자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비유를 통해 제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탕자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어떻게 다시 아버지께로 이끄는지’ 보여주셨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는 재물 앞에서 드러나는 제자의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제자도는 결국 누구를 진짜 주인으로 삼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충격적인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왜 비웃었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14절). 겉으로 경건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들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회개 대신 비웃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아신다.”(15절). 즉, 제자의 기준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해 보이는 행동을 해도,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림의 마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문제를 지적하시지만, 그들을 꾸짖는 목적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참 제자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즉 제자도의 진짜 기준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세상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에서, 그리고 형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드러나는 제자도의 기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의 진짜 기준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중심을 보신다.
제자도의 기준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장면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비웃다’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엑세뮈크테리존(ἐξεμυκτήριζον)’, ‘조롱하다’, ‘코웃음치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그건 우리와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왜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좋아하다’의 헬라어 ‘필라르귀로스(φιλάργυρος)’는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그들의 참된 주인은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도 가르침이 마음에 닿지 않았고, 그들의 중심을 찌르는 말씀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도 알고 있지만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켰고, 예배를 드렸고 헌신하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아신다”(15절). 바리새인의 문제는 행위의 부족이 아니라. 바로 중심의 왜곡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보고 ‘참 경건하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한가운데 재물이 주인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실제 ‘마음’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카르디아(καρδία)’는 단순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 의지, 결정, 방향. 존재 전체의 중심을 의미할 때 사용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도의 기준은 너무도 명확합니다. 제자는 겉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심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감추고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방향만큼은 감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출발점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 ‘나는 누구에게 마음을 드리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바리새인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은 ‘그들’의 문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를 향해 주님이 질문하십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의 인정은 신경 쓰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은 놓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진짜 기준이 무엇인지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참 제자의 길은 행동보다 중심의 방향에서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네 마음의 주인을 확인하십시오. 이 작은 시작과 방향의 전환이 우리의 신앙을 형식에서 실제로, 겉모습에서 참된 제자로 이끌어 줄 줄 믿습니다.
2.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마음을 드러내신 후 이제 왜 그들의 신앙이 문제인지, 그리고 제자도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절).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을 꾸짖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이 참된 제자인지를 밝히기 위해 두 시대를 대비시키십니다.
첫 번째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는 율법, 제사, 규례를 지키고 따랐습니다. 신앙이 곧 겉으로 표현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자체는 하나님이 세우신 귀한 질서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보다, 형식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식은 화려했지만. 중심은 비어 있었던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꼬집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전파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전파되다’로 번역한 ‘유앙겔리제타이(εὐαγγελίζεται)’는 ‘복음이 선포되다, 기쁜 소식이 퍼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제 ‘형식, 행위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결단과 삶의 방향이 너희를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의 시대는 율법시대처럼 겉모습, 형식이 아닌 ‘중심’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마땅히 그것을 강력히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침입하다’는 헬라어 ‘비아제타이(βιάζεται)’로 ‘자신을 밀어 넣다, 억지로 들어가다’라는 의미인데, 제자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심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갈망하고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 형식과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은 율법의 시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이 닫혀 있을 때, 말씀은 듣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때, 봉사는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멀 때.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에 비웃는 바리새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한 반응을 원하십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마음이 움직이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그 방향을 바꾸는 사람, 침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결단하고 실제 움직이기를 축복합니다.
3. 말씀 따르는 제자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중심과 마땅히 요구되는 제자의 자세를 선포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참 제자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7절). 먼저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한 획, 케라이아((κεραία)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작은 점, 쉼표 같은 ‘요드’가 있고, 획은 ‘케라야’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율법을 가볍게 여겨 형식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존중하며 그 본래의 뜻을 이루려 한다.’ 즉 말씀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붙잡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을 잃고 형식만, 행위와 외식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로 예수님은 18절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18절). 예수님께서 저들을 향해 지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사용했던 것입니다. 신명기 24:1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이용해서 재물에 대해선 느슨하게, 하지만 더 아름다운 아내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이혼에 대해서는 빈번하게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저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도의 기준은 말씀의 지식이 아니라 말씀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여러분, 참 제자는 말씀을 자기 편의로 해석하거나 편리한 부분만 골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마음이 무엇인지 묻고, 말씀의 방향에 내 삶을 맞춰 불편해도 순종하려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진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비유들을 통해 제자가 걸어가야만 하는 제자도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도 비웃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오늘 본문에서 제자도의 진짜 기준을 더욱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제자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형식과 외형에 머무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내 뜻에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앞에 내 마음을 맞추는 신앙입니다. 형식보다 중심을, 행위보다 마음의 주인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실제로 마음을 움직이고 결단하며,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씩 내딛는 삶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의 길을 다시 보여주시며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참 제자로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은혜의 부르심에 우리 모두 응답하며, 참 제자의 길을 소망하고 그 길을 걸어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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