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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4일
2025-12-01 06:45:26
꿈미
조회수   62

진짜 잃어버린 아들은 누구인가?

 

일시 : 2025124

본문 : 누가복음 15:25-32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비유로, 예수님의 비유 세계가 갖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과 아름답고 매우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신 것이며, 듣는 이들이 무엇을 깨닫길 원하셨을까요? 가장 먼저 누가복음 15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비유들 가운데 두 그룹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세리들과 죄인들의 무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반대하는 바리새파와 서기관,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러한 대치 가운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잃은 시리즈의 비유를 전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큰 주제를 발견합니다. 바로 잃어버림입니다. 특별히 마지막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 비유라고도 불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잃어버림의 의미와 그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 두 아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더불어 누가복음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수님의 예화입니다. 마음에 남는 소재와 유난히 길고 풍부한 이야기 전개가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둘째 아들, 소위 탕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다음은 동생의 돌이킴을 기뻐하지 않는 큰아들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 두 아들 모두를 사랑과 인내로 포용하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해석하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보는 바가 가장 적절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본문에서 말하는 두 아들 가운데 맏아들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비유의 이야기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둘째 아들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어쩌면 탕자 비유라는 말처럼 둘째 아들의 모습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맏아들에 대해서 먼저 언급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분깃, 즉 유산을 요청한 둘째 아들이 처음 소개됩니다. 어제 본문인 누가복음 1512절을 보면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말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 삼분의 일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받은 분깃을 처분해서 곧장 먼 나라로 가버리고 맙니다(15:13). 아마도 유산의 모든 것을 팔아 돈으로 바꿔 떠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그렇게 바꾼 재물을 허랑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결국 율법에서 불결한 짐승으로 분류된 돼지를 치는 일, 곧 유대인에게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게 됩니다. 곧 불결한 짐승을 치고 먹이며, 심지어 그 짐승이 먹는 음식을 공유해야 하는 그 모습은 매우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역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구제 불능의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아들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영어 성경에는 ‘come to himself’라고 써 있는데, 직역하면 그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입니다. 곧 스스로가 깨달아서 온 자기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깨운 것입니다. 로마서 24절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느니라하신 말씀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선하심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자신을 돌이키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잃었다 다시 얻은 둘째 아들을 아무 말 없이 기쁨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찾은 즐거움으로 잔치를 벌입니다.

이야기가 그대로 마무리되면 좋았을 것 같지만 이 비유는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첫째, 큰아들이 오늘 본문에서 등장합니다. 잠깐 큰아들의 답변에서 그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면 큰아들은 둘째 아들과는 다르게 아버지 곁에 있었고, 성실했으며, 명령을 잘 따랐던 문제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오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평소 큰아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반응과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이들이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즐거워한 반면, 큰아들만큼은 그렇질 않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28절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아버지는 큰아들에게 함께 잔치에 참여하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잔치를 권하는 아버지에게 오히려 무례하게 말합니다. 29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는 한글 성경의 해석이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아버지(πατήρ)’가 아닌 이보시오라고 부르며, 30절을 보면 동생 또한 내 동생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곧 큰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가족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합니다.

 

2. 누가 진짜 잃어버린 아들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비유를 탕자 이야기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잃어버린 아들은 둘째 아들이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비유를 통해 또 한 명의 잃어버린 아들이 있었음을 이 이야기 속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아온 둘째 아들보다 집 안에 있었던 아들, 첫째 아들이 진짜 잃어버린 자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25절로 32절까지 등장하는 큰아들을 보십시오. 그 아들은 한 번도 집을 떠난 적도, 아버지를 실망시키거나 명령을 어긴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동생이 돌아오자 그는 동생을 위한 잔치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아들들을 키우다 보면 형제간의 서열 갈등 때문에 종종 다투는 일은 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두 아들 사이에는 다른 갈등 문제가 없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는 둘째 아들이 더 큰 문제였고, 나쁜 아들, 잃어버린 아들로 비치지만, 여러분, 이 비유의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짜 잃어버린 아들은 누구인가?’ 여러분 이것이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숨겨진 예수님의 의도요 질문입니다.

 

3. 아버지의 마음

 

성도 여러분,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니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와 기뻤지만, 또한 노한 큰아들에게 청할 만큼 큰아들 역시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도, 함께했던 첫째 아들도 아버지에겐 모두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똑같이 사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아들은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왔으나 첫째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지 않는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나는 어떤 아들인가? 정작 믿음의 자리에 있지만 첫째 아들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실제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멀리 있진 않은가? 주님은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아들입니까? 혹 내가 첫째 아들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십니다. 아가서 2: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사랑하는 아들아, 내 잔치에 함께하자.”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돌이켜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라도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잃었다 얻은 아들이라 말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 집을 잃어버린 아들은 누구였습니까? 첫째 아들은 그 집에 거했지만, 아버지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어쩌면 진짜 잃어버렸던 아들은 탕자라 불린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저와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이 아침 다시 한번 돌이킴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사랑과 선하심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크고 넓으신 아버지 품 안에 거하며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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