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를 복으로 바꿔라!
일시 : 2025년 9월 18일
본문 : 신명기 28:36-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덕이 죽 끓듯 하다’라는 우리말 표현이 있습니다. 죽은 밥알과 물이 한데 엉겨서 끓다 보니 퍽퍽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끓어오릅니다. 그런데 그 끓어오르는 지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마구 튀어 오르기에, 언제 어느 방향에서 거품이나 물이 튀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괴팍하거나 변덕을 부리는 사람을 보고 죽에 비유하여 ‘사람의 변덕이 죽 끓듯 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변덕스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우리가 날씨를 향해 변덕스럽다고 표현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변하는 계절을 향해 변덕스럽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날씨는 예측할 수 없어도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는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측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안함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면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되고 결국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몰라 늘 불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 변덕스러운 날씨뿐만 아니라 주식시장이 변덕을 부리듯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건강하던 어느 날 몸에 작고 큰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라와 직장과 가정 등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 사고들, 그 변덕스러운 일들로 인해 불안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한 변덕은 그들이 만들어낸 신들의 변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에서 섬기는 이방 신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덕스럽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농경과 기후를 좌우하는 신들은 제사를 잘 받으면 비를 내리고, 사람들이 제사를 조금만 소홀히 하면 가뭄이나 재앙을 내린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신을 달래고자 끊임없이 점을 치고, 신들의 기분을 맞추려는 의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신의 뜻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늘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제사와 의식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두려움의 굴레’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1. 하나님은 한결같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마지막 유언 중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지에 이어,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저주를 받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저주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방 땅으로 끌려가고,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포로 상태가 되고,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며, 생산 활동이 무력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사라지는 헛수고 상태에 빠지며, 후손마저 빼앗기는 등의 얼핏 보면 하나님이 잔인해 보이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협박을 당하는 것 같아 겁에 질려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신들의 변덕과 비교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주로 일관성이 없고 변덕이 심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뜻을 명확하게 밝히고 지켜야 할 사항을 말씀으로 요구하셨습니다. 일관성을 통해 예측 가능한 환경이 제공되고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종살이했던 이집트의 신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신격화했기 때문에, 자연이 변하고 바뀌는 것, 때로는 작은 날씨의 변화 등을 신들의 변덕과 연결지어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 ‘라(Ra)’의 경우, 매일 밤 태양신 ‘라’가 저승에서 혼동의 신과 전투를 벌이고 승리했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매일 태양신 ‘라’를 위해 제사를 드리며,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까?’라는 불안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오늘도 태양신이 승리했구나’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를 축복하는 의식과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제사와 의식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두려움의 굴레’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신명기 말씀은 특별히 순종하면 어떤 복을 받는지, 그리고 불순종하면 어떤 저주를 받는지에 대한 내용이 매우 명확하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고대 이방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한결같으신 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변덕이 아닌 일관성입니다. 모세가 설명하는 순종과 불순종의 명확한 기준,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관통하는 이 세세한 내용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 내용이 한두 줄로 끝나지 않고 성경 말씀 몇 장에 걸쳐 길고 자세히 서술되고 있습니다. 사고 발생 시 대처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있어야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변덕스럽고 모호한 이방 신들과 하나님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 변덕으로 인해 모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방 신들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섬세하고 구체적인 매뉴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방 신의 변덕이 불안함을 만들어 내고,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굴레 속에서 속박되어 살게 했다면,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오늘의 말씀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변덕과 일관성이 대조를 이루고, 속박과 자유가 극명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하나님은 무엇을 알려주길 원하실까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불안함에서 벗어나 안전한 울타리 안에 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덕스러운 세상과 사람들 때문에 오늘도 전전긍긍하며 애태우고 있습니까?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세상과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의 굴레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다스리십니다.
순종과 복, 불순종과 저주에 대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 그 모두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시 고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의 불안함은 삶의 모든 영역에 서로 다른 신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신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의 신들을 보면 ①바알은 폭풍, 비, 천둥을, ②아세라는 다산과 풍요를, ③아스다롯은 전쟁과 사랑을, ④몰렉은 불과 제사를, ⑤다곤은 곡식과 농업을, ⑥레셰프는 전염병과 전쟁을, ⑦야므는 바다와 혼돈을, ⑧모트는 죽음을 다스린다고 믿었습니다. 삶의 중요한 영역들을 모두 쪼개어 담당자를 세우듯이, 여러 신들을 세워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 신도 달래야 하고, 저 신도 달래야 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삶의 중요한 영역들에 서로 다른 여러 신들을 세워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산발적인 사고방식의 결과 여러 신들을 달래며 스스로 속박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자연과 생명,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절들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6절의 정치‧군사‧사회의 영역, 37절의 명예가 놀림과 비방을 받는, 오늘날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감이 밑바닥을 치는 삶, 38-40절의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어 먹고 사는 문제에서 답이 없는 삶, 노력해도 결과가 없는, 우리 시대의 공정한 보상은 찾아볼 수도 없는 삶, 41절의 자손들마저 위협당하며 교육과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삶, 42-44절의 토지의 소산을 빼앗기며, 집값 문제를 뛰어넘는 사회적‧경제적으로 훨씬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일들, 이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할 것이 아닙니다. 개인과 공동체, 현재와 미래, 몸과 마음의 질병, 가정과 학교, 직장, 부모와 자녀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이 사람을 찾아가 볼까 저 사람을 찾아가 볼까,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이 방법을 써 볼까 저 방법을 써 볼까’ 기웃거리며 분산시키지 말고, 모두 모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해결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만남의 축복도, 적절한 타이밍에 필요한 해법도, 미래를 위한 준비와 과정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붙들고 인도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46절).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그 누구도 저주를 받으라고 유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후손이 어려움 없이 살며,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말들을 유언으로 남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성도가 이 모든 불순종의 결과들을 복으로 바꿔내길 바랍니다. 삶에 이 저주들이 일어나게 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한결같으십니다. 변함없으신 그분 안에, 말씀과 기도로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 거하며 참 자유를 누리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말고,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책임지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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