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만이 아닌, 전부의 회개로 나아가라
일시 : 2025년 6월 9일
본문 : 출애굽기 9:27-35
어느 교도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랜 수감생활 끝에 가석방 심사를 앞둔 한 재소자가 교도소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번만 무사히 넘어가면, 진짜 잘 살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습니다. “그 말, 몇 번째 하시는 거죠?” 재소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 열 번째쯤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는 입술로만 반복되는 약속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위기 앞에서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거짓 회개의 전형적인 예가 나오는데, 바로 오늘 본문의 애굽 왕 바로입니다. 출애굽기 9장은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는 이미 여섯 번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했지만, 이번 일곱 번째 우박 재앙 앞에서는 처음으로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라고 고백하며 죄를 시인합니다(27절). 그러나 모세는 바로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꿰뚫어 보았고(30절), 실제로 재앙이 그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을 돌이켜 약속을 깨뜨립니다(34–35절). 이 사건은 바로의 회개가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참된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참된 회개는 '이번만'이 아닌 우리 ‘전부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입술에서 나온 첫 마디는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였습니다(27절). 분명 잘못을 시인하는 표현이지만 무엇인가 맞지 않는 표현 같이 보입니다. 바로는 지금까지 자신의 완악함은 제쳐두고,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잘못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흔히 하는 변명인 "이번에만 잘못했을 뿐이고, 평소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기합리화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특별하게 '이번만' 잘못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존재 전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영국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죄 받아 마땅한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고, 이 죄를 내 안에서 제거해 버리고 싶어 하며, 모든 형태의 죄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단지 몇 가지 실수만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근본부터 죄에 물든 죄인입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가 절망적인 죄인이며 우리의 죄가 우리 행위의 거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바로의 고백이 거짓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완악함과 죄악 된 본성은 인정하지 않은 채 그때 당시의 위기만 모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죄를 고백할 때 순간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입술의 고백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식의 자기변명을 멈추고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전적으로 시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 정도만 고치면 괜찮다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만’의 회개가 아니라, ‘전부’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2. 참된 회개는 의지하던 것을 다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성경은 갑자기 본문 31–32절에 우박 재앙의 피해 상황을 전하면서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도 꽃이 피었으므로 상하였으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피해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자비로 남겨두신 은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늦겨울에서 초봄(1~2월경) 무렵에 보리와 삼이 먼저 자라 우박에 의해 상했지만, 아직 자라지 않은 밀과 쌀보리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곡식을 모두 없애지 않으시고 일부를 남겨두심으로써 회복의 여지를 주셨고, 이는 또 하나의 은혜로운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남겨진 곡식을 의지하면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플랜 B’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가 완전한 회개로 나아가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직 먹고 살 길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를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남겨진 가능성과 대비책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내가 남겨 놓은 것을 의지할 때는 결코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할 수 없습니다. 온전히 회개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 소망이 있다고 여기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붙들지 않습니다. 온전한 회개는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위한 마지막 변명까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자비의 흔적으로 밀과 쌀보리를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기회였고, 기다리심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 은혜를 오히려 자신의 완악함을 지탱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자기 확신 속에서 회개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에도 남겨 놓은 ‘밀과 쌀보리’는 없습니까? 이것만은 붙들고 싶고, 이것만은 내 계획대로 두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아직 남겨두신 여지, 기회, 은혜는 회개를 유예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참된 회개는 감춰둔 대책 없이, 숨겨둔 소망 없이,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기회에 너의 모든 것을 내게 맡기지 않겠느냐?” 이 새벽, 진정한 회개를 통해 남겨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 새로운 회복의 시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참된 회개는 상황이 해결된 것을 보고 결정하는 반응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은 바로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고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바로는 이전에 자신이 범죄 했노라고 고백하며 모세에게 간청했지만, 결국 그 고백은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온 일시적 반응이었을 뿐입니다. 고통이 사라지자 그의 결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상황이 나아진 것을 보고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위기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엎드리지만, 상황이 조금만 호전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번만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잠시 무릎을 꿇지만, 평안이 오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회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근심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세상 근심은 단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 하나님 앞에서 죄 자체를 미워하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바로의 고백도 그가 두려움에 잠시 양심이 찔린 결과였지, 그의 교만과 탐욕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단지 하나님의 징벌로 억눌려 있었을 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그 자체를 슬퍼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한 감정의 동요가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함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전인격적 결단입니다. 회개는 결심이 아니라 방향이어야 합니다. 상황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없을 때도, 죄가 들키지 않았을 때도 동일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결국 회개는 인간의 의지나 결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 마음을 주실 때에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 주시고, 진정한 회개의 은혜를 제게 허락하소서.” 참된 회개는 상황의 반응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이번만큼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고백은 위기 앞에서는 진심 같아 보이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쉽게 ‘다시’ 죄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바뀌곤 합니다. 바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서를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을 완전히 태워드리지 못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퍅해지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둔감해져 갑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이번만’, ‘조금만’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겨 둔 밀과 쌀보리’를 붙들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죄로 돌아가는 회개 말입니다. 이런 회개는 우리를 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지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두려움이나 위기 모면의 수단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전인격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회개할 능력도 없는 존재이며, 오직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실 때 참된 회개가 시작됩니다. 회개는 “이 정도만 바꾸면 괜찮은 사람입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통째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듭남의 출발점입니다. 다윗과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통회함으로 주 앞에 나아갔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바로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떤 회개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완전한 항복’의 회개가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 나의 남은 것을 붙드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인생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된 회개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다스리시는 시작인 줄로 믿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이 오늘, 이 새벽, 지금이길 주 안에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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