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신앙생활, 주를 위한 신앙생활
[일시] 2017년 10월 19일 목요일 새벽기도회
[본문] 사도행전 16장 19-25절
서론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헤르만 비트시우스는 '경건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실로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 위해 은혜를 원하고,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할 수 있다. 거듭난 신자는 땅에서 ‘작은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
사도바울은 본래 아시아에서 계속적으로 선교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7절을 보면,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리고 밤에 환상을 통해 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콜링으로 인정합니다.(행16:10절)
그 인도하심에 따라 빌립보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여종이 그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는 존재란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문제에 얽히지 않기를 원했기에 16장 18절에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즉,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여종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으로 인해 바울은 '심히 괴로워' 하였습니다. 결국 주께서 주신 권세로 그 여종을 긍휼히 여겨 귀신을 내쫓아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씀대로 사람에게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며 사람의 기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함이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불법적인 풍속을 전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과 실라에게 씌워진 누명이 벗겨지기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그 누명을 들은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옷을 찢어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제 바울과 실라는 깊은 옥에 갇히고, 그의 발에는 차꼬가 채워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보이는 행동은 또한 우리의 생각을 벗어납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을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긍휼함으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감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곳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우리의 뜻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때,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우리의 반응은 아마도 원망일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생각과 계획까지 내려놓았는데, 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왜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까? 이럴 거면 왜 이곳으로 오게 하셨습니까? 저희는 그냥 아시아에서 복음 전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1.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따르게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많은 매를 맞고 빛도 들지 않은 깊은 감옥에 차꼬에 차여 묶여 있습니다. 몸의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곳을 원하는 뜻대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획도 이제 소용이 없습니다. 감옥에서 나오게 될 때까지 어떤 기약도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생각하는 모든 길은 이제 막혔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들의 소명과 사명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편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합니다. 사명의 초심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영어성경은 이를 'singing hymns' 시편을 노래했다고 표현합니다. 그 찬양은 감사의 찬양일까요? 시편은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막막한 현실과 상황을 한탄하기도 하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시편을 찬양함은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와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고백한 찬양과, 그 속에 있었던 죄수들이 함께 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시편 속에 담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들은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나의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2장 42절을 보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주의 영광을 위해 나는 나의 불편함과 고난 앞에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이며, 그것이 믿음의 실천이며, 진정한 믿음의 표징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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