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일시 : 2026년 10월 22일
본문 : 사도행전 7:45-53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자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오른쪽 길로 가세요.” 하는데,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이 길은 내가 더 잘 알아.” 하며 그냥 직진합니다. 내비게이션은 몇 번이고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결국 꽉 막힌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길을 몰라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너무 잘 안다고 확신해서 생긴 일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을수록, 말씀을 많이 알수록 “그건 나도 알아.”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지나치기 쉽습니다. 스데반을 고소한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고, 스데반에게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행 6:13)라며 그를 공회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정말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주님 안에서 참된 신앙의 기쁨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장막은 광야에서 가나안까지 백성과 함께 옮겨 다녔고, 그 땅의 민족들을 쫓아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45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었기에 그분의 처소를 짓기 원했고, 솔로몬이 마침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곧바로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손으로 지은’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우상을 가리킬 때 쓰던 말입니다. 스데반은 41절에서 금송아지를 두고 백성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성전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은 성전이 담을 수 없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리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 선물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손으로 지은 집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 익숙한 예배 순서, 직분과 봉사 연수, 몸에 밴 신앙의 방식 등이 그렇습니다.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하나님은 여기 계셔야 하고, 이렇게 일하셔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주일 한 시간 안에 하나님을 모셔 두고 평소에는 내 뜻대로 사는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편함을 위해 하나님을 제한하고 가두려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모습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49절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이 땅을 발등상으로 여기시는 크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고 보고 있습니까? 주님을 내 틀 안에 모셔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주님을 알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내 틀 안에 모셔 두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다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은 45절에서 ‘우리 조상들’이라 했던 말을 51절에서는 ‘너희 조상’으로 바꿉니다. ‘목이 곧은’이라는 표현은 금송아지 사건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우상 숭배에서 돌이키지 않는 완고함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의 표를 지닌 언약 백성이었지만 마음과 귀에는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항상 그래왔습니다. 스데반은 너희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팔았고, 모세를 거절했으며, 선지자들을 박해하다가 마침내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거슬렀다며 스데반을 고소한 그들이, 정작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성령을 거스르는 모습도 많은 경우 드러내 놓고 하는 반항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며 ‘이 말씀은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하신 말씀에 귀를 닫는 모습, 말씀이 내 마음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마음, 말씀 앞에서 찔림보다 평가가 앞서는 돌같이 굳은 마음이 바로 목이 곧은 모습입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찌르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찔림을 피해 가는 것이 곧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가면서 이미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일의 말씀 앞에 새로움과 기대 그리고 설렘이 있는지를 돌아보며 우리가 늘 깨어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성령께서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교만에서 다시금 돌이킬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의 소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거스르던 마음까지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지 못하듯, 마음의 할례도 사람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라 말했고,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이스라엘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실제로 본문 바로 뒤에서, 공회가 거스른 그 성령이 스데반에게 충만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증인들의 옷을 맡은 청년 사울도 있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던 무리 한가운데 있던 그를 주님은 다메섹 길로 찾아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시며 꺾으셨습니다(행 26:1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는 삶은 성령께서 굳은 마음을 꺾으실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반응은 버티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말씀이 찌를 때 변명 대신 “주님, 제가 그 사람입니다.” 하고 회개하며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내가 쌓아 온 집, 내 손으로 지은 집을 주님 앞에 내려놓길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금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거룩한 곳을 거슬러 말한다’는 죄목으로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지나고 나면 판결이 뒤집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거스른 사람은 스데반이 아니라, 건물을 지키면서 그 주인을 거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처소는 돌로 쌓은 건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굳은 마음을 꺾고 거하시는 심령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붙들고 있는 손으로 지은 집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찌르실 때마다 고개를 돌려 피해 온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울의 굳은 목을 꺾으신 그 은혜가 우리의 목도 숙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가정을 성령 안에서 당신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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